누가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와 데이트 했나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날짜가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일 때 ?에서 ?. 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날짜가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일 때 ?에서 ?. 까지 나이 차이는 30 년 6개월 10일 이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영어: 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 8월 10일, 재위: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여왕이자 마지막 통치자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료)의 후손이다.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며, 이는 제2의 마지막 헬레니즘 국가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통치 (기원전 336년~323년) 이후 지속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모국어는 코이네 그리스어였으며 이집트어를 배운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였다.
기원전 58년,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는 당시 로마의 종속국이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경쟁자인 딸 베레니케 4세가 왕위 주장을 하게 된 후 로마로 추방되었는데,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레니케는 기원전 55년 프톨레마이오스가 로마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로 돌아온 후 처형된다. 기원전 51년 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공동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둘 사이의 갈등으로 내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내전 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경쟁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마 독재관이자 집정관)에게 패한 로마 정치가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피했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고문들의 주장대로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남매를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카이사르의 조건이 클레오파트라에게 편향적이라고 판단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수석 고문인 포테이노스는 군대를 동원해 궁전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47년 나일강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지원군이 포위를 돌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복누이인 아르시노에 4세는 공성을 지휘했기 때문에 에페소스로 추방되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했지만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적인 관계는 유지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6년과 44년에 로마에 방문했고,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렀다. 기원전 44년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암살되고 카이사르도 암살된 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서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다.
기원전 43~42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로마 제2차 삼두정치의 편에 섰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41년 타르수스에서 만난 후로 관계를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으로 아르시노에를 처형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는 동안 자금과 군사적 지원 모두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봉헌식에서는 그들의 자녀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으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지역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이 사건과 두 사람의 결혼,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소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이혼은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졌다. 옥타비아누스도 선전전에 가담했으며, 기원전 32년에 로마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의 동맹국들을 로마에서 퇴출시키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로마의 개선 행렬에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을 알자 독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최후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유산은 고대와 현대의 예술 작품에 남아있다. 로마의 역사학자들의 저술과 라틴 시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관점을 조성했고, 이는 중세 후기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에서도 만연했다. 시각예술에서는 로마 흉상, 그림, 조각, 카메오 조각, 카메오 글라스, 프톨레마이오스주화와 로마 주화, 부조 등에서 묘사되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에서는 오페라, 회화, 시, 조각, 연극 등의 많은 작품의 주제로 등장했다. 빅토리아 시대 이후에는 이집토마니아의 팝 아이콘이 되었으며, 현대에는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벌레스크 풍자, 할리우드 영화, 상업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에서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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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틴어: Gnaeus Pompeius Magnus , 기원전 75년경~기원전 45년)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아들로 카이사르에 대항해 싸우다 처형당했다.
그나이우스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그의 세 번째 아내 무치카 테르티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같은 어머니에서 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태어났다.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유능한 장군인 아버지의 슬하에서 전쟁터에 따라 다녔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내전이 발발 하자 그나이우스는 아버지를 따라 그리스로 넘어갔다. 이듬해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대패하고 도망할 때 그나이우스도 함께 도망했다. 이때 동생 섹스투스는 로마에서 빠져나와 합류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배반당했고 살해당했다. 그나이우스는 섹스투스와 함께 아프리카로 넘어가서 카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카이사르군에 결사 항전할 것을 다짐했다.
기원전 46년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탑수스 전투에서 패하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토는 죽었다. 그나이우스는 섹스투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넘어갔고 스스로 히스파니아 울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이 되어 군사를 모았다. 이듬해인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쳐들어왔고 3월 17일 벌어진 문다 전투에서 그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패배했고 몇 주 후에 도망치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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